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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hion

런던 펑크 문화와 영국 패션의 대모, 영국의 명품 패션 브랜드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by 바르베라 2022. 10. 11.

출처 : 구글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영국 태생의 패션 브랜드인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1971년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그녀의 동업자이자 연인이었던 말콤 맥라렌이 함께 영국 런던의 킹스 로드에 오픈한 의류 매장 ‘렛 잇 락(Let It Rock)’을 모태로 성장한 패션 브랜드입니다.

처음에는 구제 제품을 D.I.Y. 방식으로 리폼한 과격한 펑크 풍의 티셔츠를 제작한 뒤 ‘렛 잇 락’ 이름의 매장에서 판매하면서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던 반항적인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고 이후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동업자이자 섹스 피스톨즈와 같은 록그룹의 매니저였던 말콤 맥라렌의 도움으로 영국의 테일러링과 프랑스 로코코의 우아한 복식 양식을 접목한 의상을 선보이며 펑크 패션을 창시했습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말콤 맥라렌과 함께 매장의 이름을 자주 변경했는데, 비비안 웨스트우드라는 이름을 매장 전면에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 런던에 ‘비비안 웨스트우드’라는 간판을 단 매장을 개장했을 때부터였습니다. 이후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여성 의류 컬렉션 이 외에도 현재 남성 의류 컬렉션, 가죽 제품, 액세서리, 향수 등을 선보이고 있는 토털 패션 브랜드로 거듭나게 됩니다.

 

브랜드의 창립자인 비비안 웨스트우드 - 출처 : VOGUE

 

브랜드의 탄생과 창립자.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창립자인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본명은 비비안 이사벨 스웨어(Vivienne Isabel Swire)로 영국 더비셔의 글로솝 지역에서 1941년 4월 8일에 세 명의 아이 중 첫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방직공이고 아버지는 구두 제 조 인이었는데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부모님은 자주성 있고 밝고 현명한 분들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패션에 관심이 많아 1947년 크리스챤 디올이 선보인 뉴 룩을 아주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10대 시절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종종 직접 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그중에서는 크리스찬 디올의 뉴 룩을 따라 만든 것도 있었고 학창 시절 교복도 몸에 붙는 펜슬 스커트로 개조해 입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전쟁 후 근검절약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로 인해 옷을 만들 때 가능한 천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일반적인 서양 복식과 달리 천을 많이 재단하지 않은 채로 옷을 만드는 직선적이고 평면적인 기법이 많은 에스닉한 재단 방식을 활용했고 이는 훗날 그녀가 디자이너가 되고 난 후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어머니는 “16세 때 이미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남다르게 옷을 입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싶어요’라고 말했다.”라고 회고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그저 멋 부리기를 좋아하는 소녀였을 뿐 17세가 될 때까지는 예술에는 문외한이어서 미술책을 보거나 영화 구경을 한 적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1957년, 그녀의 가족은 런던 북서쪽에 있는 해로우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글로솝 그래머 스쿨을 졸업한 17세의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영국에서 유서 깊고 학비도 비싸기로 유명한 해로 아트 스쿨에 입학해 파운데이션 코스를 들었으나 예술가가 되기보다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기 위해 한 학기 만에 그만두고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안정적인 삶을 선택했지만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교사 생활 틈틈이 액세서리를 만들어서 벼룩시장에 내다 팔며 패션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이어나갔다고 합니다.

1962년이 되던 헤 21세의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댄스홀 매니저였던 데렉 웨스트우드와 결혼해 아들인 벤자민 어서 웨스트우드를 낳게 되었고 그 뒤로 교사 생활을 그만두었습니다. 하지만 1965년,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성격 차이로 데렉 웨스트우드와 이혼하고 런던 남부 지역에서 다시 교직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한편 같은 해,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말콤 에드워드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말콤 맥라렌이라고 불리던 그의 나이는 당시 나이가 무려 18세였습니다. 예술과 역사에 조예가 깊었던 말콤 맥라렌과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만남은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인생에 전환점이었을 뿐 아니라 훗날 패션, 음악, 그래픽 디자인 등 다방면의 문화에 영향을 끼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1967년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말콤 맥라렌과의 사이에서 아들인 조셉 페르디난드 코레를 낳았지만 틀에 속박된 사고와 관계를 좋아하지 않았던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말콤 맥라렌은 평생 혼인은 하지 않으며 자유로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1960년대 중반 런던 430번지 킹스 로드에는 ‘옥수스, ‘그래니 태이크스 어 트립’, ‘헝 온 유’ 등 몇몇 유명한 옷가게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판매하는 옷은 주로 에스닉, 히피풍의 옷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말콤 맥라렌은 이런 에스닉과 히피 스타일의 유행이 한 물 갔다고 생각했고 당시의 반항적인 영국의 사회적인 분위기에 맞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히피나 펑크 모두 무정부주의적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으나, 히피들이 입던 의상은 다양한 색상의 자연주의적인 분위기였고, 이와는 반대로 펑크는 검은색 일색이었으며 의도적으로 위협적인 차림을 한 것과 같이 히피와는 전혀 다른 특성을 가졌기 때문이죠.

 

1969년, 토미 로버트가 운영하는 ‘미스터 프리덤’이라는 옷가게가 430번지 킹스 로드에 있었는데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이곳의 단골손님이었다고 합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미스터 프리덤’에서 구입한 레오파드 무늬의 벨벳 소재 바지를 즐겨 입었고 또 직접 만든 서큘러 스커트 혹은 펜슬 스커트를 짧은 양말, 스텔레토 힐 구두와 함께 입고 다녔으며 말콤 맥라렌은 이런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화려한 공작새, 걸어 다니는 신호등’ 같았다고 회고합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말콤 맥라렌의 권유에 따라 머리를 짧게 자르고 염색까지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독특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삶의 스타일은 1971년 그녀만의 개성과 철학이 담긴 옷가게 ‘렛 잇 락’을 여는 데 자양분을 제공했고 그녀만의 패션 스타일은 훗날 펑크의 아이콘인 데이비드 보위의 스타일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출처 : VOGUE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문화적 영향력의 측면에서 명실공히 영국 패션계 여왕으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웨스트우드가 참여했던 펑크 문화는 영국을 대표하는 혁신적인 하위문화 스타일로 정착되었고 그녀가 열정적으로 탐구했던 트위드, 타탄체크, 니트 트윈 세트, 클래식 테일러링 등은 여전히 가장 영국적인 패션 요소들로 조명되고 있기 때문인데요. 웨스트우드는 영국 패션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과 1991년 연속으로 '올해의 영국 디자이너(British Designer of the Year)'로 선정되었고, 영국 여왕으로부터 1992년 OBE(대영 제국 훈장)에 이어 2006년 DBE 작위(2등급의 작위급 훈장)의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습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개성과 혁신을 추구하는 아방가르드 디자이너의 감수성과 여성으로서의 자의식, 문화적 전통에 대한 향수를 혼합해 그녀만의 스타일을 창조해내었고, 옛 문화와 전통이 창조적 혁신의 재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또 그녀의 의상은 오늘날 패션의 문화적 의미와 가치를 보존하고 확장시키는 기관인 복식 박물관들에서 꼭 소장해야 할 주요 품목 중 하나가 되었고 이러한 과거를 뒤로 하고 웨스트우드는 여전히 자신의 직관과 믿음에 따라 주류 문화의 독선을 거절하고 새로운 미래를 찾고자 하는 행보를 이어가는 중입니다.

 

출처 : 구글

 

펑크 스타일(Punk Style).

 

1970년대에는 석유파동으로 인한 국제적인 경기 불황에 따라 실업률이 증가했고 젊은 세대들은 집단적인 좌절, 절망, 분노 등을 느끼게 되었고 이에 당시 젊은 세대들은 기존의 체제에 반감을 표시했는데 이는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면서도 경건하고 지적인 분위기를 풍긴 히피와는 달리 반지식 주의를 지향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펑크는 아프리카 모히칸을 차용한 헤어 스타일에 빨강, 파랑 등 파격적인 색으로 머리를 물들여 외양만으로도 반체제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고 패션사에서 펑크의 등장은 정확히 1976년 여름 런던에서 출연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그녀가 파트너이자 섹스 피스톨즈의 매니저였던 말콤 맥라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영국 430번지 킹스 로드에 옷가게를 열고, 옷을 찢고 자르고 지퍼나 안전핀, 금속 장식 등을 덕지덕지 붙이고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나를 죽이시오’, ‘인생은 지루하다’ 등의 과격한 메시지를 새긴 티셔츠를 판매했고 반항적인 음악과 패션이 공존했던 이 가게는 점차 당시 런던의 젊은이들의 아지트가 되었다고 합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처음에는 자신의 집 부엌에서 D.I.Y. 방식으로 옷을 만들었는데,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말콤 맥라렌은 이처럼 기존의 옷을 새롭게 재창조하는 행위를 통해 관습을 거부하는 펑크의 한 양식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또한 펑크스타일을 만들어내며 ‘펑크의 대모’로 불리는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훗날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 존 갈리아노, 장 폴 고티에 등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출처 : 핀터레스트

 

영국 전통 복식의 재해석.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나의 작업은 영국 테일러링에 기초한다’고 늘 말해왔습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영국 테일러링의 전통을 현대화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이어갔는데요.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1993년 록캐런 사 와의 협업을 하며 자신의 새로운 남편의 이름을 딴 ‘안드레아스’라는 이름의 고유의 타탄체크 무늬를 개발했고, 이를 1993년 F/W 시즌 컬렉션 ‘앙골로마니아’를 통해 좀 더 캐주얼한 분위기로 재해석해 선보였습니다. 1994년 F/W 시즌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온 리버티’ 컬렉션을 통해서도 타탄체크, 킬트 스커트, 아가일 스웨터, 승마복 등 영국적인 분위기를 담은 의상을 선보이며 전 세계에 영국적인 전통 의상을 고루한 것이 아닌, 좀 더 젊고 경쾌한 분위기로 알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출처 ; 구글

 

비비안 웨스트우드 드레스(Vivienne Westwood Dress).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입체 드래이핑 방식을 즐겨 사용합니다. 이는 패턴을 바닥에 그리고 이에 따라 소재를 재단하고 봉제해 옷을 만드는 일반적인 테일러링 방식이 아니라 마네킹에 천을 대고 직접 주름을 잡고 다트를 넣는 등의 방식으로 완성되기 때문에 비비안 웨스트우드 특유의 풍성한 옷을 만드는 핵심 봉제 기술이라고 합니다. 특히, 이런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화려한 드레스인데요.

 

2008년, 동명의 TV 시리즈를 영화로 만든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에서 주연을 맡은 사라 제시카 파커는 결혼식 날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습니다. 이 드레스는 금빛이 도는 아이보리 컬러의 코르셋과 광택 있는 재질의 풍성한 스커트, 날렵한 네크라인이 특징이었는데 이와 같이 여성스러운 동시에 반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입체적인 드레스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대표 상품입니다.

 

출처 : 구글

 

비비안 웨스트우드 플랫폼 슈즈(Vivienne Westwood Platform Shoes).

 

밑창 전체를 높게 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플랫폼 슈즈는 펑크를 기반으로 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아이템 중 하나입니다. 특히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플랫폼 슈즈는 1990년대 중후반 일본에서 크게 유행해 이를 신고 운전을 하던 여성이 자동차 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내거나 높은 굽 때문에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등 관련된 사고가 속출하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는는데요.

무엇보다 1993년, 모델 나오미 캠벨이 40cm가 넘는 높이의 비비안 웨스트우드 플랫폼을 신고 무대에서 워킹 중에 넘어진 사건은 20세기 패션사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중요한 장면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을 싫어한다. 때로는 아픔이나 불편함도 참아야 한다. 멋진 하이힐을 신으려면 발이 아파도 참아야 한다. 그래야 특별해질 수 있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은 재미없고 지루하다. 그런 점에서 내 옷이 멋지다.” 이와 같이 플랫폼 슈즈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디자인 철학이 가장 잘 담긴 브랜드의 대표 상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 구글

 

타탄체크 및 ORB 로고를 새긴 제품.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ORB 로고와 타탄체크는 20세기 대중들에게 가장 성공적으로 각인된 표식 중 하나입니다. ‘전통을 살려 미래로’라는 뜻을 담고 있는 ORB로고는 전통과 현대의 복식 양식을 미스 매치해 새로운 창조물을 내놓는 비비안 웨스트우드를 가장 잘 나타내는 표식이기도 하며 매 시즌, ORB 로고와 타탄체크를 새긴 가방, 지갑, 명함지갑 등은 유행에 따라 약간의 장식과 중심 컬러를 변형하며 꾸준히 베스트셀링 제품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출처 : 구글

 

지구 환경을 생각하는 협업.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는 대부분 지구 환경을 위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행보와 동일선상에 있습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2013년 러쉬라는 코스메틱 브랜드와 협업해 유기농 면 소재로 만든 스카프 패키지를 선보였는데 이는 매년 수십만 톤 발생하는 선물용 포장지를 줄이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또한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멜리사라는 신발 브랜드와 협업하여 젤리 슈즈를 선보였으며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멜리사는 한번 신고 버리는 신발이 아니라 버려지는 신발을 녹여서 얻은 소재로 다시 신발을 만든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고 합니다. 환경을 생각하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경향은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광고에도 반영되었는데요. 2011년 F/W 시즌 광고 캠페인에서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쓰레기 더미 위에서 광고 촬영을 했는데 이는 버려지는 쓰레기를 재활용하고 아프리카의 자연을 보호하자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출처 : 구글

 

펑크의 대모, 시대의 아이콘 비비안 웨스트우드.

 

비비안 웨스트우드 브랜드의 정체성은 동명의 디자이너에게서 비롯됩니다. 무난하지 않았던 결혼 생활, 파격적인 옷차림 등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대중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과감함으로 늘 화제를 몰고 다녔고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일상생활에서 보이는 모습 또한 브랜드가 많은 팬을 거느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평생 400파운드짜리 좁은 월세 집에서 살았으며, 60세를 넘는 나이에도 자전거를 타고 디자인 사무실에 출근했고, 현재의 남편인 안드레아스 크론탈러가 집을 구한 후에야 자신의 집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1941년 생인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70세를 훌쩍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사회적인 문제에 의견을 내며 시대의 아이콘, 패션계의 오피니언 리더다운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린피스와 같은 환경 단체의 캠페인을 돕고,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스코틀랜드 분리독립에 찬성의 목소리를 드높이기도 했으며 또한 아프리카 등지의 빈곤층과 소외된 여성에게 일자리를 창출을 통해 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해 길거리의 현수막, 텐트 등을 재활용해 제작된 가방 등 ‘윤리적인 패션 아프리카’를 2010년도에 론칭했습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브랜드의 설립자이자 운영자라는 위치와는 상충되게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옷을 쇼핑하지 말 것을 독려하며, 그녀 자신도 방송 출연 등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날 때 같은 옷을 여러 번 입고 나와 자신의 패션 철학을 몸소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한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환경을 위해서는 덜 사고 덜 소비해야 한다. 물건을 살 때 아무 생각 없이 구입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주장하며 케이트 미들턴 왕세자비에게도 공식적인 인터뷰를 통해 ‘같은 옷을 입은 모습을 여러 번 보고 싶다. 좋아하는 옷이 있으면 그걸 다양하게 연출하는 것이 멋진 옷차림이다’라고 언론 인터뷰를 통해 공식적으로 조언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 구글

 

과거 서양 복식과 이국문화의 믹스매치.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정확한 테일러링을 통해 편안함을 제공하는 영국 패션의 특성과 디자인 및 정확한 프로포션의 미적 측면을 중요시하는 프랑스 패션의 특성을 동시에 이해하고 적용하는 디자이너였습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자신이 태어난 영국의 패션과 프랑스의 문화를 비교 연구하며 영감을 얻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디자인 정체성을 만들어나갔다고 하며 화려했던 프랑스와 영국의 옛 복식 스타일을 조합한 결과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의상은 미니멀리즘이 주도한 1990년대를 전후한 패션 경향과는 정반대로 연극적이고 웅장한 특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1996년 S/S 시즌에 선보인 ‘르 팜므(Les Femmes)’ 컬렉션에서 모델 린다 에반젤리스타가 입었던 웅장한 치마 사이즈와 극도로 화려한 장식의 드레스는 18세기 로코코 시대의 와토 가운을 비대칭적으로 변형시켜 만든 것으로 전통 패션, 특히 로코코 궁정 문화에서 영감을 얻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며 이는 현재 영국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의상에서 또 하나 주목할만한 점은 서구 복식 문화에서 오랫동안 규범으로 확립되어 온 겉옷과 속옷의 개념과 형식을 무시하고 해체시키는 방법을 통해 옛 의상을 진부하지 않게 표현한 점입니다. 일례로 1987년 F/W 시즌에 선보인 ‘해리스 트위드’ 컬렉션에서는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코르셋을 처음으로 만들어 선보였고 이를 겉옷과 함께 보이도록 믹스 매치했고 1982년 F/W 시즌에 선보인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버팔로’ 컬렉션에서는 브래지어를 티셔츠 위에 덧입힌 파격적인 스타일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영국과 프랑스의 전통 복식을 차용하면서도 이국적인 문화에서 영감을 받아 비대칭적이고 자유분방한 ‘겹쳐 입기’ 방식을 도입한 비비안 웨스트우드 컬렉션은 패션 비평가들에 의해 20세기 후반 부상한 포스트모던 패션의 중요 사례로 꼽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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