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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hion

독보적인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 까르띠에(Cartier)

by 바르베라 2022. 9. 13.

출처 : 구글

까르띠에(Cartier).

 

까르띠에(Cartier)는 주얼리를 비롯해 향수, 시계, 필기구, 안경, 스카프 등을 제작, 판매하는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로 세공 기술자였던 루이 프랑스 까르띠에(Louis Francois Cartier)는 1847년 그의 스승이었던 아돌프 피카르(Adolphe Picard)의 아틀리에를 인수했고 자신의 성을 따 ‘메종 까르띠에(Maison Cartier)’로 변경했습니다.

1850년대 까르띠에는 섬세한 세공을 바탕으로 화려한 주얼리 라인을 선보여 프랑스 사교계에서 인기를 얻었고 이후 가업을 물려받은 까르띠에 가의 형제들이 적극적으로 해외 시장에 진출해 브랜드 인지도를 넓혔으며 이후 까르띠에는 1964년까지 가족 경영 체제로 유지되다가 1993년 방돔 럭셔리 그룹(Vendome Luxury Group)에 합병되었고 1997년 리치먼드 그룹(Compagnie Financière Richemont S.A.)이 방돔 럭셔리 그룹을 인수하면서 리치먼드 그룹의 자회사가 되었습니다.

 

파리 뤄 드라 빼 13번지에 위챘던 까르띠에 부티크(좌) / 루이 까르띠에가 산토스 뒤몽에게 선물한 시계(우) - 출처 : 나무위키

 

까르띠에의 역사.

 

까르띠에 설립자인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화약동 제조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손기술이 좋았던 그는 1847년 아돌프 피카드의 보석세공 수습사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당시 몽고 트로이가 31번지의 보석 작업장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훗날 까르띠에 최초의 시작이었죠. 견습일을 하던 중에 그의 사장 아돌프가 갑작스럽게 죽자 수습생이었던 그는 자기의 스승의 회사를 인수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메종 까르띠에’로 이름을 변경하게 됩니다.

까르띠에가 설립된 곳인 프랑스가 프랑스 혁명 이후로 사회가 안정되고 파리 곳곳에서 호화스러운 파티와 무도회가 열렸다. 호화로운 파티에 참석하는 귀족들의 치장을 위해 주얼리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까르띠에가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날이 발전해가는 도중 프랑스 황제의 사촌이던 마틸드 공주가 까르띠에를 방문했고 그의 작품에 매료되어 공주의 입소문으로 입소문을 타게 되어 인지도가 큰 지금의 까르띠에로 발전하게 되었고 마틸드 공주의 후원으로 당시 파리 상류층의 중심부 이탈리아 대로로 사업장을 옮겼습니다.

1874년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는 아들 루이 프랑수아 알프레드에게 일을 가르치며 가족 경영의 포문을 열게 됩니다. 1898년 알프레드는 자신의 첫 번째 아들인 루이와 동업을 시작하게 되고 1899년 까르띠에는 현재로 치면 청담동 명품 거리와 같은 명품 거리 뤼 드라 빼 13번지에도 사업장을 열었고, 세 형제 중 사업 능력이 가장 뛰어났던 첫째 루이가 뤼 드라 빼 매장을 관할하게 되었으며 이후 알프레드는 자신의 세 아들들에게 회사를 맡기며 세계적인 회사로의 도약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후 1902년에는 뉴욕과 런던에도 지점을 열게 되었고 두 줄로 된 흑진주 목걸이와의 교환으로 얻은 뉴욕 5번가의 모트 플랜트 빌딩은 훗날 까르띠에 인터내셔널사의 본부가 됩니다. 이미 이 시기에 까르띠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보석 브랜드로 인정받고 있었으며 여담으로 영국의 왕자가 "보석상의 왕이요, 왕의 보석상"이라고 칭송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며 왕위 대관식에서 쓰일 왕관 제작도 맡게 되었습니다. 왕관을 만든다는 것은 최고의 보석사로 인정받은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1904년 에드워드 7세는 영국 왕실의 공식적인 보석상으로 인정했습니다. 이와 같은 유명세와 인정은 스페인포르투갈루마니아이집트 왕실, 올리언즈 일가, 모나코 왕국, 알바니아 왕실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루이를 비롯한 세 아들들은 최고의 상품성을 유지하기 위한 아름다운 보석을 찾아 세계 곳곳을 다녔다고 합니다. 러시아페르시아 지역, 인도 등 세계를 돌아다니며 발견한 아름다운 보석은 곧 까르띠에 상품이 되었고, 당시 제작된 주얼리 중 몇몇은 오늘날까지도 까르띠에를 대표하는 디자인으로 남게 되었죠.

남다른 감각을 자랑하던 루이 까르띠에는 수많은 유산을 남겼다. 이전까지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백금을 이용한 디자인으로 보석계에 혁신을 가져왔고, 보석상으로 시작했지만 손목시계 제작으로도 매우 유명합니다.

 

1904년에는 친구인 산토스 뒤몽에게 선물하기 위해 2년간에 걸쳐 디자인한 산토스 시계는 시계 제조의 현대적인 디자인의 손목시계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1917년 최초로 만들어진 탱크 워치는 오늘날까지도 큰 인기를 얻고 있으며 미스터리 클락, 폴딩 버클 등의 특허 상품도 까르띠에의 대표작이죠.

 

출처 : 구글

 

까르띠에를 만날 수 있는 국내 매장들.

 

시계류만 판매하는 매장은 정식 매장이 아니며 보석과 시계 모두 다루는 매장이 정식 부티끄입니다. 따라서 국내 매장은 정식 부띠끄만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1) 메종 청담 플래그십 스토어

2) 롯데백화점 (본점, 잠실점)

3)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 판교점, 무역센터점)

4)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타임스퀘어점, 센텀시티점, 대구 신세계)

5)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 EAST

 

시계 매장은 비교적 많은 편이지만 보석까지 함께 판매하는 정식 매장은 매우 적습니다. 3대 명품 중 하나인 루이비통보다 매장 수가 훨씬 적을 정도로 매장이 많지 않으며 입점기준 또한 까다롭기에 귀금속 업계에서 까르띠에의 위상을 생각하면, 입점 기준이 그만큼 높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호남권과 충청권엔 아직 매장이 없으며, 과거에는 대백 프라자에도 매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백화점 대구점이 개점하면서 매장을 철수했고, 현대 대구점은 22년 3월에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백화점 기준 전국 10개의 매장이 있으며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서는 복층 매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여러 백화점에서도 상당히 큰 매장,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시계나 주얼리 매장은 의류나 잡화 브랜드에 비하여 큰 규모를 차지하지 않는데도도 복층을 할당한다는 것은 중요성을 매우 높게 보는 것이죠. 실제로 명품 시계, 주얼리 브랜드 중 복층 매장을 운영하는 브랜드는 까르띠에반 클리프 앤 아펠이 유일무이합니다.


면세점은 주로 롯데와 신라 면세점 매장에 입점해있으며 청담동에 아시아 최초로 까르띠에 메종을 선보이며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었으나 샤넬에게 건물을 매각 후 바로 옆 옆 건물로 이전하여 까르띠에 메종 청담으로 다시 오픈했습니다.

 

출처 : 구글

 

까르띠에의 시그니처 라인업.

 

까르띠에는 브랜드 설립의 시작이었던 주얼리에서부터 시계, 향수, 액세서리 등을 출시하고 있으며 주얼리는 반지, 귀걸이, 팔찌, 목걸이, 펜던트, 브로치 등이 있고 이 중 반지는 신부를 위한 ‘결혼식용(Bridal)’으로 약혼반지와 결혼반지로 특화되어 선보이고 있습니다. 또 시계와 향수는 컬렉션 별로 남성용, 여성용이 있고 액세서리는 가방, 지갑, 벨트 등의 가죽제품과 선글라스, 아이웨어, 볼펜, 만년필 등의 필기도구, 라이터, 머니 클립 등의 개인용품, 상자, 도자기 등의 인테리어 소품, 여성용 스카프 등의 다양한 상품들이 존재하지만 단연코 이 중 까르띠에의 대표 상품은 시계와 주얼리입니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르노 탱크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탱크 시계(좌) / 오늘날의 탱크 머스트(우) - 출처 : 구글

 

까르띠에 탱크(Cartier Tank).

 

탱크는 1917년 루이 까르띠에가 개발한 시계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장에서 활약한 프랑스 르노 탱크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습니다. 첫 번째 출시된 탱크 시계인 ‘탱크 노르말(Tank Normale)’은 사각형 프레임이 러그 부분이 밀착되어 시계의 배젤의 윗부분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여 시계의 옆 프레임이 마치 탱크의 두 바퀴를 연상시켰으며 또한 산토스 시계는 프레임의 모서리를 약간 둥글게 해 곡선미를 부여한 것과 달리 탱크는 프레임의 곡선을 거의 없애고 단순한 직선미를 강조한 디자인이었습니다.

 

탱크 시계의 첫 프로토타입(Prototype, 시판에 앞서 미리 테스트 및 홍보용으로 제작하는 제품)은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 파견된 미국 장군 존 퍼싱(John Pershing)에게 헌정되었으며 1919년 일반 고객을 대상으로 시장에 출시되었습니다. 처음 출시된 탱크 시계는 프레임을 골드 혹은 플래티넘(Platinum, 백금)으로 6개만 한정 제작되어 소수의 부자들만 구입할 수 있었으나 이들을 통해 대중들 사이에서 명성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탱크는 특히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파리에서 유행했던 아르데코(Art Déco) 스타일이었고, 실제로 출시 이후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되었죠.

이후 탱크는 다양한 버전으로 제작되었습니다. 1922년에는 개발자인 루이 까르띠에의 이름을 딴 ‘탱크 루이 까르띠에(Tank Louis Cartier)’가 만들어졌고 1928년에는 시계판이 회전하면서 시와 분을 표시하는 ‘탱크 아 기쉐(Tank à guichets)’, 1932년에는 과격한 활동에도 시계를 보호할 수 있도록 시계의 프레임을 앞뒤로 뒤집을 수 있는 형태의 ‘탱크 바스퀼랑트(Tank Basculante, 바스퀼랑트는 프랑스어로 앞뒤로 움직인다는 의미)’가 제작되었습니다. 또 1936년에는 비대칭형 사각 프레임의 ‘탱크 아씨메트리크(Tank asymétrique)’, 1977년에는 젊은 세대를 겨냥해 화려한 색상의 시계판을 적용한 ‘탱크 머스트 드 까르띠에(Tank Must de Cartier)’가 만들어졌습니다.

 

1989년에는 만곡형(활 모양으로 굽은 형태)의 프레임이 특징인 ‘탱크 아메리칸(Tank Americaine)’, 1996년에는 시계 끈을 스틸로 만든 ‘탱크 프랑세즈(Tank Francaise)’, 2012년에는 오른쪽 베젤 안에 용두를 넣은 ‘탱크 앙글레즈(Tank Anglaise)’가 출시되었는데 이는 초기 까르띠에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 본사와 해외 지사가 있었던 지역인 미국, 프랑스, 영국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2013년에는 까르띠에에서 생산한 무브먼트인 1904 MC를 탑재한 ‘탱크 MC(Tank MC)’ 등을 출시했습니다.

탱크는 출시 초기부터 전 세계의 문화 · 예술계의 유명인사들이 착용하면서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는데요. 탱크는 이탈리아의 유명 배우인 루돌프 발렌티노(Rudolph Valentino)가 영화 ‘족장의 아들(The Son of the Sheik)’에 출연 당시 개인 소장했던 탱크 시계를 착용함으로써 주목을 받았으며,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 프랑스 가수 이브 몽땅(Yves Montand), 미국 배우 클라크 게이블(Clark Gable),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Lady Diana Frances Spencer)가 착용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미국의 팝스타 마돈나(Madonna), 할리우드 배우 안젤리나 졸리(Angelina Jolie),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Michelle Obama) 등이 탱크 시계를 애용하며 그 인기를 더더욱 높이 사고 있습니다.

 

출처 : 구글

 

트리니티 드 까르띠에(Trinity de Cartier).

 

트리니티 드 까르띠에는 1924년 루이 까르띠에가 제작한 주얼리 컬렉션으로 3개의 고리가 하나로 연결된 형태입니다. 트리니티(Trinity)는 3개가 하나로 된 것을 의미하며 프랑스의 시인인 장 콕토는 토성(Saturn)의 고리를 형상화한 반지를 만들어달라고 친구인 루이 까르띠에에게 요청을 했고, 루이 까르띠에는 서양 문명에서 성스러움, 완전을 의미하는 숫자 3을 세 개의 링으로 표현해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세 개의 링을 하나로 엮었을 때 색이 어울려 보이도록 각각의 링을 옐로 골드, 화이트 골드, 핑크 골드로 제작했고, 여기서 옐로 골드는 신의(Fidelity), 화이트 골드는 우정(Friendship), 핑크 골드는 사랑(Love)을 상징했죠. 같은 해 이 디자인을 적용해 팔찌가 제작되었고, 트리니티 컬렉션인 ‘트리니티 드 까르띠에’가 시작되었습니다. 트리니티 드 까르띠에는 반지, 팔찌, 펜던트, 귀걸이 등으로 제작되고 있으며 까르띠에를 상징하는 아이콘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트리니티 링은 장 콕토가 착용해 파리 상류사회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으며 이후에도 다양한 버전으로 제작되었습니다. 2010년 까르띠에는 장 콕토가 죽기 전에 살던 집을 파리 근교로 이전하는 것을 지원했고 장 콕토를 기념해 새로운 트리니티 드 까르띠에를 출시하였습니다.

 

이때 발표된 ‘트리니티 라 벨(Trinity la Belle)’은 장 콕토가 왼손 새끼손가락에 끼던 두 개의 트리니티 링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버전으로, 화이트 골드 링을 제외한 두 개의 링이 각각 두 갈래, 세 갈래로 세공되어 있어 착용했을 때 마치 6개의 링이 엮인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이 중 화이트 골드 링에는 까르띠에 로고와 다이아몬드 별이 새겨져 있으며 이 별은 장 콕토의 사인에 항상 등장하던 별을 상징합니다. ‘트리니티 소바지(Trinity Sauvages)’는 화이트 골드 링에는 다이아몬드를 세팅했고, 옐로 골드 링에는 검은색으로 표범 무늬를 표현했으며 핑크 골드 링에는 까르띠에 로고가 새겨져 있었고 팔찌와 펜던트로도 제작되었습니다.

 

출처 : 구글

 

까르띠에 러브 컬렉션(Cartier LΘVE Collection).

 

러브는 1970년 까르띠에의 주얼리 디자이너 알도 치풀로(Aldo Cipullo)가 처음 제작한 팔찌에서 시작된 주얼리 컬렉션입니다. 알도 치풀러는 중세 유럽 시기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원정을 떠나는 남편이 아내에게 채운 정조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러브 팔찌를 고안했으며 러브 팔찌는 타원형에 나사 2개가 대칭으로 박혀있으며 이를 조여 착용하는 형태입니다.

러브 팔찌는 일단 팔에 끼운 후 특수 제작된 스크루 드라이버로 팔찌의 나사를 조여서 착용하는 방식으로 혼자서는 착용할 수 없고 팔찌를 풀 수도 없어서 결합, 사랑의 맹세, 아름다운 구속을 의미하는 ‘러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또한 나사의 모양은 원을 반으로 자른 형태로 그것의 특징을 반영해 팔찌 이름인 ‘LOVE’도 ‘LΘVE’로 표기하고 있죠.

러브 팔찌는 그날의 활동이나 옷에 맞춰 선택하는 액세서리가 아니라 착용자가 부여한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색다른 액세서리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까르띠에는 제품의 특성과 이름에 맞추어 출시 당시 뉴욕 맨해튼 5번가에 있는 까르띠에 뉴욕지사에서 행사를 열어 유명인 커플 25쌍을 초청했고 이 행사에서 미국의 영화배우들인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와 리처트 버튼(Richard Burton), 캐리 그랜트(Cary Grant)와 다이언 캐넌(Dyan Cannon),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과 알리 맥그로(Ali Macgraw) 등의 커플들이 서로의 팔목에 팔찌를 채운 재밌는 일화도 있죠.

또 까르띠에는 러브 팔찌의 디자인에서 모티브를 얻어 다른 제품들을 선보였습니다. 러브 팔찌의 나사는 1978년 제작된 ‘산토스 드 까르띠에’ 컬렉션 시계의 베젤에 적용되기도 하였으며 까르띠에는 1979년에는 팔찌에 다이아몬드를 박기도 하였고 1983년 ‘러브 반지’, 1984년에는 ‘러브 커프 링크스(Cuff links, 장식 단추), 1985년에는 ‘러브 귀걸이’를 선보였습니다. 이 제품들은 팔찌와 함께 ‘러브’ 컬렉션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버전과 디자인으로 출시되고 있으며 까르띠에를 대표하는 시그니처 라인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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