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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hion

여자 핸드백 & 뷰티 브랜드 추천, 프랑스 파리에서 론칭한 럭셔리 명품 패션 브랜드 생 로랑(Saint Laurent)

by 바르베라 2022.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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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구글

 

생 로랑(Saint Laurent).

 

생 로랑은 1961년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이 프랑스 파리에서 론칭한 패션 브랜드로서, 2012년 이브 생 로랑에서 생 로랑으로 브랜드명을 변경했다. 생 로랑은 1960년대의 일반적 패션 형태였던 고급 맞춤복인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로 브랜드를 시작했으나 1966년에 기성복 전문 브랜드 ‘리브 고시(Rive Gauche)’를 선보이며 우아한 것이 전부였던 당시 패션에 젊은 스트리트 감성을 도입했다. 생 로랑은 여성을 성차별로부터 해방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르 스모킹(Le Smoking)’, 예술을 패션에 도입한 대표적 사례인 ‘몬드리안 컬렉션(Mondrian Collection)’ 등을 선보이며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 코코 샤넬(Coco Chanel)과 함께 20세기 패션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이자 브랜드가 되었다.

 

브랜드의 창립자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 출처 : 구글

 

브랜드의 탄생과 창립자.

 

1936년 8월 1일, 이브 생 로랑은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알제리 오랑(Oran)에서 태어났다. 그림 그리기, 글쓰기, 영화 등에 관심이 많았던 이브 생 로랑은 11세였던 1947년, 루이 주베(Louis Joubet)가 감독한 연극 ‘아내들의 학교’(L’Ecole Des Femmes, 몰리에르(Molière)가 1662년 발표한 희극으로 나이 든 남자가 순종적 아내를 얻기 위해 인위적 교육을 시키지만, 그녀가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막지 못하고 좌절한다는 내용)를 보고 크리스티앙 베라르(Christian Berard, 디자이너, 화가)가 디자인한 작은 정원, 침실, 샹들리에 등으로 구성된 무대 세트와 섬세한 고전 의상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브 생 로랑은 이 연극 무대와 의상을 직접 만들어보며 창작에 대한 꿈을 키웠다.

이브 생 로랑은 17세가 되던 1953년, 그동안 작업한 코트, 드레스, 수트 등의 디자인 스케치를 국제 양모 사무국의 디자인 콘테스트(International Wool Secretariat Competition)에 제출했다. 국제 양모 사무국 디자인 콘테스트는 크리스찬 디올, 위베르 드 지방시(Hubert de Givenchy), 쟈크 파트(Jacques Fath) 등 유명 디자이너가 심사하고 신인 디자이너를 발굴하는 권위 있는 대회였다. 이브 생 로랑은 이 대회에서 3등을 차지해 부모님과 함께 파리에 시상을 하러 갔는데 당시 ‘보그’(Vogue) 프랑스판의 편집장인 미셸 드 브루노프(Michel De Brunhoff)를 만나게 되었다. 이브 생 로랑의 재능을 눈여겨본 미셸 드 브루노프는 이후 이브 생 로랑에게 도움을 주는 조력자가 되었다.

1954년, 이브 생 로랑은 미셸 드 브루노프의 조언에 따라 디자인과 재단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 의상 조합(Chambre Syndicale de la Haute Couture)에 입학했지만 정규 디자인 수업에 실망하고 3개월 만에 자퇴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국제양모사무국의 디자인 콘테스트에 참가하여 1등을 수상했다. 1955년 이브 생 로랑은 미셸 드 브루노프에게 자신의 새로운 스케치를 보여주었고 미셸 드 브루노프는 이 스케치가 아직 발표도 하지 않은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 가을, 겨울 컬렉션의 A라인 스커트와 비슷하다는 사실에 강한 인상을 받아 즉시 이브 생 로랑을 크리스찬 디올에게 보냈다.

크리스찬 디올은 이브 생 로랑의 스케치를 보고 그 자리에서 이브 생 로랑을 어시스턴트 디자이너로 채용했다. 이브 생 로랑은 크리스찬 디올의 오트 쿠튀르 컬렉션과 액세서리 디자인을 도우며 크리스찬 디올이 가장 많이 의지하고 조언을 구하는 디자이너로 성장했다. 1957년 크리스찬 디올의 가을, 겨울 컬렉션에서 이브 생 로랑이 디자인한 의상은 35벌에 달할 정도로 이브 생 로랑의 영향력은 커졌다. 1957년 10월,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올이 심장마비로 급작스럽게 사망했고 1957년 11월 15일, 이브 생 로랑이 21세의 나이로 크리스찬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다.

다음 해인 1958년 1월 30일, 이브 생 로랑은 디올에서의 첫 컬렉션으로 트라페즈 라인(Trapéze Line)을 선보였는데 사다리 형태를 띈 원피스와 스커트는 매우 참신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인 1958년 8월, 이브 생 로랑은 디올에서 두 번째 컬렉션을 통해 루즈한(Loose, 느슨한) 실루엣에 길이도 무릎 밑까지 내려오는 드레스 류를 발표했고, 이에 젊은 사람들은 열광했지만 보수적인 중년층에서는 이브 생 로랑의 과감한 디자인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음 해인 1959년, 디올 경영진은 이브 생 로랑에게 보수적인 고객들의 취향에 맞는 컬렉션을 선보일 것을 권유했고, 이브 생 로랑은 안정적이고 우아하며 길이도 긴 옷을 선보이며 다시 한번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브 생 로랑은 크리스찬 디올에서의 네 번째 쇼에서 다시 호블 스커트(Hobble Skirt, 밑이 좁아지는 스커트로 걸을 때 ‘절룩거린다’는 의미로 이름 붙여짐)라는 대담한 컬렉션을 발표하여 크리스찬 디올의 옷을 입는 보수적인 고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이에 크리스찬 디올 경영진은 이브 생 로랑에게 경고를 했고 이브 생 로랑은 다섯 번째 컬렉션을 통해 점잖은 수트를 선보였지만 여섯 번째 컬렉션인 1960년에 젊은 사람들의 스트리트 패션에서 영감을 받은 비트 룩(Beat Look)을 선보여 보수적인 크리스찬 디올 고객을 다시 한번 경악하게 했다. 비트 룩은 검은색의 니트 터틀넥, 가죽 재킷 등 캐주얼한 아이템이 주를 이루어 디올을 입는 고객들의 우아한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크리스찬 디올 하우스는 이브 생 로랑을 군대에 보냄으로써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공석으로 만들고 여기에 마르크 보앙(Marc Bohan)을 새로 임명했다.

군대에 간 이브 생 로랑은 고국인 알제리가 식민지 해방을 위해 싸우는 장면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 20일이라는 짧은 군 생활을 마감한 뒤 병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당시 이브 생 로랑의 동성 연인이었던 피에르 베르제(Pierre Bergé)는 이브 생 로랑을 대신하여 1961년 디올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10만 달러의 보상금과 임시 사무실을 받았고, 같은 해 9월, 미국의 사업가인 맥 로빈슨(J. Mack Robinson)에게 지분의 80%를 넘기는 조건으로 3년간 70만 불을 지원받아 이브 생 로랑의 이름을 딴 오트 쿠튀르 하우스 론칭을 도왔다. 이것이 생 로랑 브랜드의 시작이었다.

 

출처 : 구글

 

예술 작품을 패션에 도입한 브랜드.

 

1965년 이브 생 로랑은 가을, 겨울 컬렉션에서 몬드리안 드레스를 선보였다. 몬드리안 드레스는 피에트 몬드리안의 ‘빨강 노랑 파랑의 구성’(Composition with Red, Yellow and Blue)과 같은 작품의 조형적인 컬러 블록(Color Block)을 프린트로 옮겨놓은 것으로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 1965년 9월호는 이 컬렉션을 ‘미래의 드레스 - 빳빳한 흰 저지(Jersey) 소재로 뚜렷하게 특징지어져 있고, 체형을 멋지게 나타내도록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드레스’라고 평했다. 몬드리안 드레스는 패션 잡지 역사상 가장 많이 촬영된 옷으로 기록되었고, 이브 생 로랑이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확실히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1966년 이브 생 로랑은 니키 드 생 팔르(Niki de Saint Phalle, 프랑스의 여류 조각가)와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팝아트(Pop Art) 컬렉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빨간 입술, 알록달록한 심장, 원색의 해와 달, 여성의 몸 등의 그림을 넣은 드레스는 니키 드 생 팔르의 조형작품 ‘블랙 비너스(Black Venus)’와 앤디 워홀의 판화 시리즈를 떠오르게 했다. 1969년, 이브 생 로랑은 조각가 클로드 라란느(Clude Lalanne)와 협업하여 조젯 크레이프(Georgette Crepe, 얇고 표면이 멜론 껍질처럼 주름 모양인 소재로 특유의 빳빳함이 특징) 소재로 만든 우아한 롱 드레스에 청동으로 형태를 딴 가슴 혹은 허리 조각 작품을 옷에 달았다. 이는 옷으로 감춰져야 하는 신체 부위가 조각을 통해 오히려 강조됨으로써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만들었다.

1979년 가을, 겨울 시즌에 이브 생 로랑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오마주(Hommage, 영화에서 존경의 표시로 다른 작품의 주요 장면이나 대사를 인용하는 것을 이르는 용어) 컬렉션을 선보였고 연이어 1980년 기욤 아폴리네트(Guillaume Apollinaire)와 장 콕도(Jean Cocteau), 1981년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와 페르낭 레제(Fernard Leger), 1987년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1988년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gue)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컬렉션에 도입했다. 특히 1988년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해바라기 그림을 넣은 재킷은 자수의 대가인 장 프랑수아 르사주(Jean Francois Lesage)와 협업하여 만들었는데, 해바라기 문양에 35만 개의 스팽글과 10만 개의 자개가 들어갔으며 수를 놓는 데 600여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브 생 로랑의 행보는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 등의 후배 디자이너들이 예술 작품을 도입해 컬렉션을 만들도록 영감을 주었다.

 

출처 : 구글

 

타국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생 로랑 컬렉션.

 

어린 시절을 남아프리카 오랑에서 보낸 이브 생 로랑은 아프리카 미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1967년 봄, 여름 컬렉션에서 이브 생 로랑은 아프리카의 밤바라(Bambara) 부족의 예술 작품과 민속 의상에서 영감을 받은 아프리칸 컬렉션(African Collection)을 선보였다. 이브 생 로랑은 아프리칸 컬렉션을 통해 오트 쿠튀르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소재인 조개껍데기, 나무 구슬, 동물의 이빨 모양 비즈(Beads, 구슬) 등을 사용했다.

더 나아가 1973년, 이브 생 로랑은 아프리카계 이만(Iman), 아시아계 티나 초우(Tina Chow) 등 다양한 문화적 백그라운드(Background)를 가진 모델을 기용하기도 했다. 고고한 오트 쿠튀르 무대에 흑인 모델을 세운 것은 이브 생 로랑이 최초였다.

1976년 이브 생 로랑은 오트 쿠튀르와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을 통해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Pavlovich Diaghilev, 러시아 출신으로 발레뤼스(Ballets Russes)를 창단하여 기존의 틀과 다른 발레를 추구함으로써 무용사에 큰 업적을 남김)와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네덜란드의 화가)의 그림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Woman with a Pearl Necklace)에서 영감을 받아 러시안 룩(The Russian Look)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는 큰 호평을 받았고 이브 생 로랑도 자신의 컬렉션 중 이를 최고로 뽑았다고 한다.

1977년 7월에는 18세기 중국에서 영감을 받은 컬렉션을 선보이며 에스닉(Ethnic, 민속적)한 컬렉션 시리즈를 이어갔고, 이브 생 로랑의 영향으로 패션계에는 이국 취향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출처 : 구글

 

시스루(See Through).

 

1967년, 페미니스트들은 브래지어(Brassiere)처럼 여성을 억압하는 속옷을 태워 버리자고 주장하며 여성 인권 신장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브 생 로랑은 더 나아가 1968년 1월에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채로 가슴이 다 비쳐 보이는 파격적인 시스루 룩을 선보였는데 페미니스트들은 이를 여성 해방의 상징처럼 여기며 환영했다. 당시 매우 과감한 디자인이었던 시스루 룩은 훗날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는 중요한 모티프(Motif)가 되었고 2010년을 전후해서는 연예인뿐 아니라 일반인 사이에서도 매우 유행하여 일상적으로 착용하는 옷이 되었다.

 

출처 : 보그

 

르 스모킹(Le Smoking).

 

19세기 턱시도는 신사들의 이브닝 웨어(Evening Wear)였으며, 여성의 출입이 금지된 흡연실에서 남성들이 즐겨 입는 복장이었다. 그 후 1930년대 요제프 폰 스턴버그(Josef Von Sternberg) 감독의 영화 ‘모로코’(Morocco,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에 주둔한 외인 부대의 사병과 술집 여가수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1930년 미국 영화)의 여주인공 마를레네 디트리히(Marlene Dietrich)가 남성용 턱시도를 입은 매혹적인 모습으로 영화에 등장해 인기를 모은 바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여성이 팬츠 슈트를 입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브 생 로랑은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남성용 턱시도를 입은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턱시도를 여성을 위한 새로운 이브닝 룩으로 제안했다. 그렇게 1966년 가을, 겨울 컬렉션에서 탄생한 ‘르 스모킹’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점과 프랑스의 판탈롱(Pantalon) 법에 의해 공공장소에서 바지 착용이 금지되었던 여성이 낮이나 밤이나 모두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적 의의를 가진다.

이브 생 로랑의 르 스모킹을 가장 먼저 입은 것은 이브 생 로랑의 친구이자 뮤즈였던 모델 베티 카트루스(Betty Catroux)였다. 1966년 베티 카트루스가 이브 생 로랑의 턱시도를 입고 파리 오페라에 나타났을 때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브 생 로랑은 ‘만약 내가 디자인한 모든 것 중에 단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것은 르 스모킹일 것이다’라며 르 스모킹에 대한 애정을 표한 바 있다. 이런 전통을 가진 르 스모킹은 1966년부터 2002년 이브 생 로랑이 은퇴할 때까지 매 시즌 소개되며 이브 생 로랑의 상징이 되었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에디 슬리만으로 바뀐 지금도 여전히 르 스모킹은 생 로랑의 대표 제품이다.

 

출처 : 생 로랑 파리스 홈페이지

 

리브 고시(Rive Gauche).

 

1966년 9월 26일 생 로랑의 기성복 라인인 리브 고시(Rive Gauche)의 첫 부티크가 문을 연 파리의 투르농 거리(Rue De Tournon) 21번지는 당시 젊은 학생과 예술가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이브 생 로랑은 젊지만 부유하지 않은 흥미로운 여성들을 위해 오트 쿠튀르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의 기성복 리브 고시를 만들었다. 리브 고시 라인은 이브 생 로랑을 좀 더 자유롭게 만들었다. 이브 생 로랑은 리브 고시 라인을 통해 베이식(Basic)하고 심플(Simple)한 디자인의 옷을 만들었다. 이브 생 로랑 리브 고시 이후 패션계의 판도가 상류층 여성에서 활기차고 합리적인 젊은 여성으로 바뀌었고, 점차 파리의 고급 맞춤복인 오트 쿠튀르 컬렉션보다 기성복인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에 더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출처 : 구글

 

매니시한 의상(Mannish).

 

1962년 이브 생 로랑은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서 피 코트를 선보였다. 남성 선원들이 입는 피 코트를 여성을 위한 고급 맞춤복 컬렉션에서 선보인 것은 새로운 시도였고, ‘라이프’(Life)지는 ‘샤넬(Chanel) 이후 최고의 슈트를 선보였다’고 평했다.

1963년 이브 생 로랑은 보이시 룩(Boyish Look)을 통해 남성들의 옷인 선원의 재킷, 농부의 셔츠, 어부의 방수복 등을 여성스러운 소재인 트위드, 새틴과 같은 소재로 재해석함으로써 여성복의 활동성과 자유로움을 극대화하기도 했다.

이브 생 로랑이 생 로랑으로 변화한 현재,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에디 슬리만은 매니시(Mannish, 여성의 옷에 남성의 이미지를 넣은 스타일. 남성적인 매력을 여성복에 표현한 것)한 의상인 피 코트, 더플코트(Duffle Coat), 트렌치코트(Trench Coat)를 생 로랑의 대표 아이템으로 제시하며 컬렉션을 통해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더플백(좌) / 삭 드 주르 백(우) - 출처 : 구글

 

생 로랑 더플 백(Duffle Bag) / 생 로랑 삭 드 주르 백(Sac De Jour Bag).

 

2013년 1월 생 로랑에서 새롭게 선보인 더플 백은 생 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에디 슬리만으로 임명되고 생 로랑으로 재론칭한 후 처음 선보인 ‘퍼머넌트(Permanent)’ 컬렉션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더플 백은 심플한 디자인과 백 전면에 금색으로 엠보싱 처리된 로고가 특징이다. 더플3, 더플6, 더플12, 더플24, 더플48이라는 이름을 붙여 5가지 사이즈로 선보이는데, 가방 이름 뒤에 붙여진 숫자의 의미는 이 가방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더플 24는 하루 동안의 여행에 적합한 사이즈이며, 더플 48은 이틀 동안의 여행에 적합한 사이즈이다.

 

삭 드 주르는 2013년 하반기 생 로랑에서 론칭한 새로운 퍼머넌트 컬렉션이다. 미니멀(Minimal)하고 클래식(Classic)한 사각형 디자인의 삭 드 주르는 실용적인 목적 이외의 다른 디자인은 모두 배제하여 군더더기를 최소화한 것이 특징이다. 가방 손잡이에 단 작은 자물쇠와 이브 생 로랑 리브 고시 초창기 매장에 사용한 헬베티카(Helvetica) 서체로 쓴 새로운 로고 ‘생 로랑 파리(Saint Laurent Paris)’가 유일한 장식이다. 이렇듯 에디 슬리만이 새롭게 선보인 생 로랑의 새로운 백은 현재의 생 로랑이 추구하는 미니멀하고 컨템퍼러리(Comtemporary)한 지향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출처 : 구글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한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이브 생 로랑은 기성복 라인인 리브 고시 컬렉션을 통해 고상한 하이 패션과 대중적인 스트리트 패션의 높은 벽을 허물었고, 늘 ‘나는 여성이 내 옷 안에서 좀 더 당당해지길 원한다’고 말하곤 했다. 이브 생 로랑에게 패션이란 고상한 귀부인도 자유분방한 스트리트 패션을 입을 수 있고 반대로 자유분방한 소녀도 멋진 슈트를 입을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이브 생 로랑은 르 스모킹을 통해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팬츠 슈트를 여성도 입을 수 있도록 했고, 시스루 룩을 통해 감춰야 했던 여성의 신체를 드러냄으로써 여성이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이브 생 로랑은 패션계에서 ‘진정으로 여성을 위로하는 옷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다.

 

출처 : 구글

 

문화적 아이콘과 이브 생 로랑.

 

이브 생 로랑은 다수의 연극, 영화 의상을 제작했다. 1966년 이브 생 로랑은 파리 앰배서더 극장(Le Théâtre Des Ambassadeurs)에서 상연한 장 콕토(Jean Cocteau) 감독의 연극 ‘지옥의 괴수들(Les Monstres Sacrés)’ 중 아를레티(Arletty)의 의상을 디자인했고, 1967년 영화 ‘세브린느(Belle De Jour)’에서 카트린 드뇌브(Catherine Deneuve)의 의상을 디자인하여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1968년의 영화 ‘열애(La Chamade)’, 1969년 프랑수아 트뤼포(François Roland Truffaut) 감독의 영화 ‘미시시피의 인어(La sirène du Mississipi)’에서 카트린 드뇌브가 입은 의상 역시 모두 이브 생 로랑이 디자인했으며, 1978년 루이 주베 극장(Athénée Théâtre Louis‐Jouvet)에서 열린 장 콕토의 연극 ‘쌍두 독수리(L'Aigle à deux têtes)’와 1980년 ‘나는 고발한다(Cher Menteur)’의 의상도 이브 생 로랑이 디자인했다.
이브 생 로랑은 ‘피가로의 결혼(Le Mariage De Figaro)’을 비롯하여 ‘노트르담 드 파리(Notre Dame De Paris)’, ‘온종일 숲 속에서(Des Journées Entières Dans Les Arbres)’ 등의 의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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